12·3 비상계엄의 밤을 기억한다. 그날 밤 11시 30분쯤 서울시청 광장엔 싸라기눈이 내렸다. 사대문 안 주요 언론사 사옥에 장갑차가 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와 우리 팀원들은 시청 광장과 광화문을 뛰어다녔다. 군인은 없었다. 장갑차도 없었다. 기이하고 두려운 밤이었다.
그때 시민들은 국회에서 군경과 대치했다. 잠들지 못한 다른 시민들은 분노와 불안 속에 뉴스를 확인했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의 실정이 공화국의 위기를 불렀다. 비상계엄 이후 탄핵이냐 아니냐, 파면이냐 아니냐를 두고 나라가 두 쪽이 났다. 이 분열과 갈등을 봉합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발 관세전쟁이 발발했는데 우리나라에는 통수권자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 국정은 사실상 마비됐다. 의대 정원 증원, 밸류업, 규제개혁 등의 국정과제는 줄줄이 멈춰 서거나 사실상 백지화됐다.
이런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의 힘을 빼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권, 군 통수권, 법률 거부권, 사면권을 다 갖고 있다. 레임덕 전까지 대통령은 곧 여당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는 없다.
개헌해야 한다. 분권형 대통령제, 양원제, 중대선거구제 등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할 방법은 많다. 이미 각계 전문가들이 이 주제를 두고 충분히 논의했다.
개헌은 차기 대통령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6공화국 거의 모든 대통령의 끝은 좋지 않았다. 임기 말 지지율 하락과 레임덕을 피한 대통령은 없었다. 대통령 8명 가운데 3명이 퇴임 후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3명이 탄핵소추를 당했고 2명이 파면됐다.
비극은 대통령 개인의 인품, 역량과 상관없이 찾아왔다. 현행 대통령제가 비극의 씨앗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국민들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개헌에 찬성하는 여론이 70%에 육박한다. 이번 비상계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개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록 철회했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일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가 달랐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개헌을 약속했던 후보 모두 대통령이 된 뒤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지키지 못했다. 다음 대통령이 그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대권을 잡기 전에 개헌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6·3 조기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차선은 후보자들이 개헌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선 직후 몇 개월 내에 원포인트 개헌으로라도 대통령 권력을 조정하기로 못을 박아야 한다.
‘안 되면 말고’ 식의 가벼운 약속은 안 된다. 개헌 안 하면 직을 내놓겠다는 각오가, 확언이 필요하다. 이번이 아니면 기약이 없다.
강신 사회2부 기자(차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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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 사회2부 기자(차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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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 사회2부 기자(차장급)
2025-04-17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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