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꽃보다 잡초/황수정 논설위원

[길섶에서] 꽃보다 잡초/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9-04-14 22:36
수정 2019-04-15 03:05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개나리 적막한 가지에 꽃망울 터질 생각 눈곱만치도 없었을 때. 봄이라지만 이름만 ‘봄’이었을 때. 뾰족뾰족 정수리를 디미나 했더니 어느 아침 에라 모르겠다, 떼지어 진격한 연둣빛 풀들. 여남은 걸음쯤의 강 언덕에는 새파란 잡풀들이 봄마다 꽃보다 먼저였다.

심심하고 펑퍼짐한 저 둔덕에 누가 눈길을 주었을까, 꽃보다 부지런한 잡풀들이 없었더라면. 삼태기로 쏟아져 내린 햇볕의 노고는 누가 알아보았을까, 목을 빼고 봄비를 기다린 풀씨가 없었더라면. 꽃들은 피어 마음껏 소란했을까, 푸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는 풀밭이 없었더라면. 그러니 지금은 잡풀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구근 화초 가득 실은 트럭이 우리 동네에 왔다. 덜커덕 시동을 걸면 꼴까닥 숨이 넘어갈 것 같던 지난봄의 그 고물 트럭.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정말 부서지지도 않고 또 왔다.

주먹만 한 플라스틱 튤립 화분이 단돈 이천원. “봄 들여가요, 봄!”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엉터리 헐값에, 고물 트럭 주인장이 시인보다 더 시인처럼 새물의 봄 시를 쓰는 시간.

엎드려 납작해도, 쭈그려 쪼글쪼글해도 이름 없는 것들이 기어이 먼저 데려온 봄. 또 기적 같은 이 봄.

sjh@seoul.co.kr
2019-04-15 2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챗GPT의 성(性)적인 대화 허용...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글로벌 AI 서비스 업체들이 성적인 대화, 성애물 등 ‘19금(禁)’ 콘텐츠를 본격 허용하면서 미성년자 접근 제한, 자살·혐오 방지 등 AI 윤리·규제 논란이 한층 가열되고 있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도 ‘GPT-4o’의 새 버전 출시 계획을 알리며 성인 이용자에게 허용되는 콘텐츠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19금 대화가 가능해지는 챗GPT에 대한 여러분은 생각은 어떤가요?
1. 찬성한다.
2. 반대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