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닿은 추억의 힘

시간을 거슬러 닿은 추억의 힘

입력 2010-03-27 00:00
수정 2010-03-27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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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 신작 시집 ‘살구꽃 그림자’

시인 정우영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을 거슬러 흐른다. 먼저 그가 시를 쓰는 속도는 세상의 속도를 거스른다. 등단 21년의 중견 시인이지만 그의 시집은 이번에 내놓은 신작 시집 ‘살구꽃 그림자’(실천문학 펴냄)까지 더해도 고작 3권이다.

시집조차 1~2년에 한 권씩 내놓는 ‘속도의 사회’를 그는, 7년에 1권 과작(寡作)이란 방법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시집 ‘살구꽃’에서 내어 놓은, 오래 묵힌 그의 시편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추억의 공간에 닿는다. 수록된 시편 중 많은 수가 시인이 열세 살 이전까지 머물던 ‘깡촌’ 고향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오래 치매를 앓은 할아버지, 여든이 넘어 초경의 때를 되짚는 어머니를 비롯해 시인을 키워 냈던 수많은 ‘아재’들이 있다.

이런 추억의 시·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에 대한 시인의 애틋함은 단지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마흔아홉 해 전 우리 집 / 우물곁에서 베어진 살구나무이다 (중략) 서러운 날 꿈자리에서는 늘 우물곁으로 돌아가 / 심지 굳은 살구나무로 서 있곤 한다.’ 같은 고백처럼 이들은 시인이 일상을 견뎌내는 힘으로 작용하며, 또 추억 이전의 자기 근원에 대한 물음이 되기도 하다.

정우영의 시간은 큰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작은 역사에 천착하기도 한다. 20년 전 ‘노동해방문학’을 만들어 내며 거대한 역사에 투신했던 그는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역사 속에서 그 같은 가치들을 찾아낸다. 뜨거웠던 이력이 있기에 그가 추억 속에서 꺼내 놓은, 발동기에 손을 잡아 먹힌 ‘유동 아재’나 쉰내 나는 운동화를 벗고 공원에 누운 ‘김개동씨’ 등 인물들은 그저 지나간 것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표지 디자인에도 추억이 묻어 있다. 안상수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시인의 전작들을 독파하고 시인의 기억이 묻혀 있는 전북 임실의 고향집까지 동행한 끝에 이를 내놨다. 깔끔하고 단정한 가운데 속표지에는 어린 시인이 들었을 대숲의 바람소리와 그가 보았을 낡은 집 흙벽의 그을음 등이 숨어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2010-03-2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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