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시대의 사랑?… 적당한 거리두기는 사랑을 오래 지속시킨다
사람은 정말 무엇으로 사는 걸까.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남긴 세계적인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9.9~1910.11.20)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서 ‘사랑’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단편소설 주인공 시몬의 집에 머무는 미하일(천사)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저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829년 귀족(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기차여행 중 감기에 걸렸고 이는 곧이어 폐렴으로 번지자 작은 간이역 아스타포브의 역장 집을 빌려 몸져누웠다가 191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는… 나는… 사랑한다…”였다고 합니다.
예전 ‘코로나시대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당신과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새삼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진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 일정한 거리두기, 보고싶어도 참을 수 있는 시간, 마음의 간격을 두면 사랑은 영원할 겁니다. 그 거리를 두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되고 관계도 오래 갈 수 있을 겁니다.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지않을 겁니다. 인간관계가 힘들때, 사랑하는 사람과 마찰이 생길 때, 거리를 두면 어떨까요. 상대를 ‘공격’하지 않게 되고 상대를 ‘공경’하게 될 지 모릅니다.
#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외돌개가 된 할머니… 노부부의 사랑은 애달프다
옛날 서귀포에는 바닷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이좋은 한 노부부가 살았다고 합니다. 바다가 잔잔해 배를 띄우기에 좋은 날, 할머니가 “하르방, 바당에 강 하영 잡앙 옵써예(여보(할아버지), 바다에 가서 많이 물고기 잡아오세요)” 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채비를 마치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실제 고기를 떼로 잡은 할아버지는 돌아가서 할머니에게 많은 고기를 자랑할 생각에 흥에 겨워 그만 돌아오는 시간을 살짝 넘기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도, 배도,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는 결국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돌이 바로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외돌개입니다.
제주 올레길 7코스의 시작점인 외돌개를 찾았다. 얼마만인가. 30여년 만인 듯 싶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는 정말 전설처럼 “하르바앙~ 하르바앙~”하고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관광객들도 삼매봉 앞 주차장에서 내려와 외돌개를 마주하는 순간, 감탄사를 내지른다. 아찔한 벼랑 앞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먼 바다를 보며 애타게 할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닮기도 한 듯 하다. 사람이 늙은걸까, 사랑이 늙은걸까. 사랑에 감흥이 없을 때 이곳을 찾으면 어떨까. 새로운 사랑이 새봄처럼 싹틀지 모른다.
사실 이 외돌개는 용암 바위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남은 높이 20m, 폭 7~10m에 이르는 돌기둥이다. 이곳은 12만여년 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회색에 구멍이 작은 돌인 조면안산암으로 형성된 바위섬이다. 주변의 암석이 파도에 의해 침식되고 이렇게 강한 암석만 남아 있는 굴뚝 형태의 돌 기둥을 과학 용어로는 시스텍 (sea stack)이라 한다. 이 외돌개를 중심으로 해안 침식 절벽과 동굴이 절경을 이룬다. 노부부의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실제 고려말 원나라 세력을 물리칠 때 잔여세력이 범섬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최영장군이 외돌개를 장군 모습으로 꾸며 이들을 물리쳤다고 하여 장군바위라고도 불린다.
외돌개 머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하얗게 새지도 않고, 해송과 키 작은 나무가 버티며 자라고 있다. 그 너머로 범섬이 아른거린다. 외돌개 오른쪽 산책로로 걷다보면 기암절벽들을 만나게 되는데 뱀인 듯, 용인 듯, 기암괴석이 외돌개를 향해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있다. 그 위에는 ‘(대)장금이 포토존’이 소나무를 벗삼아 서 있다. 예전에는 이 벌판에 말들이 풀을 뜯던 서정적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넓은 공원으로 변해 있다. 그리고 7코스의 서쪽으로 계속 걷다보면 최근 지어진 메리어트호텔로 이어진다.
반면 외돌개 왼쪽으로 다시 걸어 돌다보면 12동굴 전망대와 황우지해변 선녀탕이 나온다. 현재는 낙석 위험으로 인해 내려가는 계단을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검은 현무암이 요새처럼 둘러 쳐진 선녀탕은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듯 코발트빛이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유혹을 억제한다. 최근 법망을 피해 냉수마찰을 하던 무리가 카메라 영상에 딱 잡혀 보도된 적도 있다. 위험하다는 경고문이 무색해졌다.
# 매화꽃 세송이가 연달아 핀 ‘삼매봉’… 남극노인성을 관측할 수 있는 남성정에 서다외돌개와 올레길 7코스가 시작되는 바로 이곳엔 삼매봉이란 오름이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시민공원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관광객들이 외돌개를 찾는 발길에 비하면 한적해서 그만이다. 삼매봉 주변으로는 오름을 한 바퀴 돌아 정상으로 갈 수 있는 1.2㎞ 길이의 산책길도 나 있다.
삼매봉 버스주차장 옆 오른쪽으로 나 있는 샛길로 접어들면 삼매봉으로 가게 된다. 시작부터 계단이 가파르다. 10여분 계단을 밟으면 소나무 공원 운동시설이 나오고 전망대 팔각정인 남성정이 보인다. 서귀포 앞바다에 아름답게 떠 있는 범섬, 새섬, 문섬, 섶섬 그리고 서쪽으로는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한라산의 설경과 서귀포 시내가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삼매봉의 정상부에서 동쪽 편은 서홍동이고, 서쪽 편은 호근동으로 불린다. 이 오름은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매화꽃 세송이가 연달아 있는 것 같은 모양새라고 하여 ‘삼매봉 (三梅峰)’이라 부른단다. 다르게는 아름다운 것이 세 개 겹쳐 있다고 하여 ‘삼미봉(三美峰)’, 옛날 벼슬아치들과 혼례 때 신랑이 쓰던 모자를 닮았다고 하여 ‘사모봉(紗帽峰)’이라고도 한다. 또는 ‘새미양’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름의 북쪽에 있는 하논의 넓은 굼부리와 이 오름의 북동쪽을 흐르는 솜반내가 모두 물이 많이 솟아나는 샘이라고 하여 ‘새미양’이라고도 했단다.
특히 남성정에는 서귀포시에서만 보이는 남극노인성 ‘카노푸스’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관측시간표도 나와 있다. 운 좋으면 3월 10일에는 오후 7시 2분부터, 3월 20일에는 오후 7시 10분부터 약 3시간 만나 볼수 있단다. 노인성(老人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 부르는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상징하는 별. 우리나라에서는 서귀포시 해안에서만 관측이 가능한 별이란다.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은 이 별을 보기 위해서 한라산에 세 번이나 올랐다고 쓰여있다. 이 별이 밝게 보이면 국운이 융성하고 전쟁이 사라지며, 이 별을 세 번 보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로 노인성제를 매년 춘분과 추분에 두 번 지냈다고 안내하고 있다.
남성정에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여러 문인들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쓴 시를 쓴 액자들이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 김상헌, 김윤식, 정온 등의 시들이다. 그들의 마음으로 앉아 서귀포 앞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외돌개가 되듯….
‘노인성을 바라보다 잠시 돌아보니/자라 등에 신산은 백 척의 누대였네/상전벽해를 어찌 이상하다 하리요/이제 곧 말을 타고 영주를 지나 가리니.’(추사 김정의 ‘연희각 주인’에게)
‘남극에 신령스런 별 하나 있으니/호성 아래에 있는 별이라네/새벽에 바라보면 파월인 듯 보이고/저녁에 바라보면 밝은 등불 감춘 듯/조정에서는 국운의 형통함을 점치고/백성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다네.오로지 중국 형산과 한라에서만 볼 수 있지만/다른 곳에서는 볼 수 있다 하는 걸.’(김상헌의 노인성).
#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기당미술관에서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서귀포를 만나다세상에서 가장 초췌하고 가장 쓸쓸하고 가장 허허로운 사내가 나오는 그림을 지천명의 나이가 되자 사랑하게 됐다. 척박한 제주섬,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초로의 사내, 그 자화상을 만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성큼성큼 슬픔이 밀려 올라온다. 바로 제주 서귀포가 낳은 작가 변시지(1926. 5. 29~2013. 6. 8.)선생의 그림이다.
지난해부터 선생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삼매봉 동쪽 자락에 있는 기당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삼매봉을 내려와 방문했다. 그는 1987년 초대관장으로 취임해 국내 최초의 시립미술관인 서귀포시 기당미술관 정착에 힘을 보탰다.
1926년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태어난 변 화백은 6세 때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으로서 약관의 나이(23세)에 조선인 최초로 최고(광풍)상 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당대 일본 화단의 거장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20여년간 일본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둥지를 틀고 결혼하면서 교육자와 화가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업을 구축해나갔다. 그는 1975년부터는 제주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2013년 6월 8일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제주의 색, 새로운 기법을 찾기 위한 길고 긴 시도와 방황 끝에 어느 아침, 일어나는 순간 텅 빈 캔버스가 장판지 색깔로 휘덮이는 것을 발견했단다. 까칠까칠한 느낌의 황갈색이었다. 원초적이고 극도로 단순한 황갈색톤.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 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그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톳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체험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그림 속에 방금 전 삼매봉 아래 외돌개와 벼랑끝 절경들이 반복재생되듯 펼쳐진다. 고독과 외로움, 쓸쓸하고 처연한, 그리고 아찔한 풍경이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여백의 붓끝 초가집에 눌러 앉아 있거나 혹은 초가지붕 위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 사내, 혹은 한가로이 말 한마리와 쉬는 사내, 때론 위태롭게 폭풍 앞에 서 있는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변시지 화백의 자화상에 나오는 사내처럼 생긴 황학주 시인은 그가 내놓은 산문집 ‘변시지의 그림으로 가는 마흔 세 걸음’에서 선생의 황토빛 ‘기다림’이란 작품 속에서 ‘삶의 첫번째 원칙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고, 많은 기다림으로 얼룩진 바다는 불망이 얼마나 하염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오늘도 물결 짓는 것이며, 기다림은 기다림 다음에도 기다림이라는 함축이다. 언뜻 그림은 기다림의 매혹에라도 빠진 듯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 ‘소식’에 담긴 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내를 보며 시인은 마주하고 있는 절벽은 바다로 차단된 길의 기호이며, 동시에 바다 너머 또 다른 길의 기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기당미술관 특별전 ‘변시지, 그림과 함께 기억되다’는 아쉽게 3월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 다만 제주현대미술관 문화예술공공수장고에서 ‘변시지: 황금빛 고독, 폭풍의 바다’를 4월21일까지 실감미디어 영상전시로 만날 수 있다.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공원 내 외돌개의 모습. 멀리 범섬이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바다에서 바라본 외돌개와 삼매봉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남긴 세계적인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9.9~1910.11.20)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서 ‘사랑’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단편소설 주인공 시몬의 집에 머무는 미하일(천사)을 통해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저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829년 귀족(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기차여행 중 감기에 걸렸고 이는 곧이어 폐렴으로 번지자 작은 간이역 아스타포브의 역장 집을 빌려 몸져누웠다가 191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는… 나는… 사랑한다…”였다고 합니다.
예전 ‘코로나시대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당신과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새삼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진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 일정한 거리두기, 보고싶어도 참을 수 있는 시간, 마음의 간격을 두면 사랑은 영원할 겁니다. 그 거리를 두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되고 관계도 오래 갈 수 있을 겁니다.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지않을 겁니다. 인간관계가 힘들때, 사랑하는 사람과 마찰이 생길 때, 거리를 두면 어떨까요. 상대를 ‘공격’하지 않게 되고 상대를 ‘공경’하게 될 지 모릅니다.
외돌개 앞 기암괴석이 마치 용 혹은 뱀의 앞머리 부분을 닮아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외돌개 동쪽 산책로를 걷다보면 만나는 황우지해변의 선녀탕. 지금은 낙석 위험으로 출입이 금지돼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황우지해변에서 더 동쪽으로 걷다본면 멀리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미군상륙에 대항하기 위해 파 놓아 어뢰정을 숨기던 동굴(갱도) 황우지 12동굴이 내다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외돌개가 된 할머니… 노부부의 사랑은 애달프다
<26>노인성과 만나는 삼매봉
실제 고기를 떼로 잡은 할아버지는 돌아가서 할머니에게 많은 고기를 자랑할 생각에 흥에 겨워 그만 돌아오는 시간을 살짝 넘기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도, 배도,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는 결국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돌이 바로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외돌개입니다.
동쪽에서 바라본 외돌개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사실 이 외돌개는 용암 바위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남은 높이 20m, 폭 7~10m에 이르는 돌기둥이다. 이곳은 12만여년 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해 회색에 구멍이 작은 돌인 조면안산암으로 형성된 바위섬이다. 주변의 암석이 파도에 의해 침식되고 이렇게 강한 암석만 남아 있는 굴뚝 형태의 돌 기둥을 과학 용어로는 시스텍 (sea stack)이라 한다. 이 외돌개를 중심으로 해안 침식 절벽과 동굴이 절경을 이룬다. 노부부의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실제 고려말 원나라 세력을 물리칠 때 잔여세력이 범섬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최영장군이 외돌개를 장군 모습으로 꾸며 이들을 물리쳤다고 하여 장군바위라고도 불린다.
외돌개 머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하얗게 새지도 않고, 해송과 키 작은 나무가 버티며 자라고 있다. 그 너머로 범섬이 아른거린다. 외돌개 오른쪽 산책로로 걷다보면 기암절벽들을 만나게 되는데 뱀인 듯, 용인 듯, 기암괴석이 외돌개를 향해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있다. 그 위에는 ‘(대)장금이 포토존’이 소나무를 벗삼아 서 있다. 예전에는 이 벌판에 말들이 풀을 뜯던 서정적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넓은 공원으로 변해 있다. 그리고 7코스의 서쪽으로 계속 걷다보면 최근 지어진 메리어트호텔로 이어진다.
반면 외돌개 왼쪽으로 다시 걸어 돌다보면 12동굴 전망대와 황우지해변 선녀탕이 나온다. 현재는 낙석 위험으로 인해 내려가는 계단을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검은 현무암이 요새처럼 둘러 쳐진 선녀탕은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듯 코발트빛이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유혹을 억제한다. 최근 법망을 피해 냉수마찰을 하던 무리가 카메라 영상에 딱 잡혀 보도된 적도 있다. 위험하다는 경고문이 무색해졌다.
삼매봉 오름 정상에서 만나는 소나무가 어우러진 운동시설. 제주 강동삼 기자
# 매화꽃 세송이가 연달아 핀 ‘삼매봉’… 남극노인성을 관측할 수 있는 남성정에 서다외돌개와 올레길 7코스가 시작되는 바로 이곳엔 삼매봉이란 오름이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시민공원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관광객들이 외돌개를 찾는 발길에 비하면 한적해서 그만이다. 삼매봉 주변으로는 오름을 한 바퀴 돌아 정상으로 갈 수 있는 1.2㎞ 길이의 산책길도 나 있다.
삼매봉 버스주차장 옆 오른쪽으로 나 있는 샛길로 접어들면 삼매봉으로 가게 된다. 시작부터 계단이 가파르다. 10여분 계단을 밟으면 소나무 공원 운동시설이 나오고 전망대 팔각정인 남성정이 보인다. 서귀포 앞바다에 아름답게 떠 있는 범섬, 새섬, 문섬, 섶섬 그리고 서쪽으로는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한라산의 설경과 서귀포 시내가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삼매봉의 정상부에서 동쪽 편은 서홍동이고, 서쪽 편은 호근동으로 불린다. 이 오름은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매화꽃 세송이가 연달아 있는 것 같은 모양새라고 하여 ‘삼매봉 (三梅峰)’이라 부른단다. 다르게는 아름다운 것이 세 개 겹쳐 있다고 하여 ‘삼미봉(三美峰)’, 옛날 벼슬아치들과 혼례 때 신랑이 쓰던 모자를 닮았다고 하여 ‘사모봉(紗帽峰)’이라고도 한다. 또는 ‘새미양’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름의 북쪽에 있는 하논의 넓은 굼부리와 이 오름의 북동쪽을 흐르는 솜반내가 모두 물이 많이 솟아나는 샘이라고 하여 ‘새미양’이라고도 했단다.
남극노인성을 만날 수 있는 남성정이 삼매봉 정상에 우뚝 서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남성정에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여러 문인들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쓴 시를 쓴 액자들이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 김상헌, 김윤식, 정온 등의 시들이다. 그들의 마음으로 앉아 서귀포 앞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외돌개가 되듯….
‘노인성을 바라보다 잠시 돌아보니/자라 등에 신산은 백 척의 누대였네/상전벽해를 어찌 이상하다 하리요/이제 곧 말을 타고 영주를 지나 가리니.’(추사 김정의 ‘연희각 주인’에게)
‘남극에 신령스런 별 하나 있으니/호성 아래에 있는 별이라네/새벽에 바라보면 파월인 듯 보이고/저녁에 바라보면 밝은 등불 감춘 듯/조정에서는 국운의 형통함을 점치고/백성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다네.오로지 중국 형산과 한라에서만 볼 수 있지만/다른 곳에서는 볼 수 있다 하는 걸.’(김상헌의 노인성).
삼매봉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기당미술관에서 변시지특별전이 열렸다. 사진은 변 화백의 검소한 작업실인 화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기당미술관에서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서귀포를 만나다세상에서 가장 초췌하고 가장 쓸쓸하고 가장 허허로운 사내가 나오는 그림을 지천명의 나이가 되자 사랑하게 됐다. 척박한 제주섬,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초로의 사내, 그 자화상을 만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성큼성큼 슬픔이 밀려 올라온다. 바로 제주 서귀포가 낳은 작가 변시지(1926. 5. 29~2013. 6. 8.)선생의 그림이다.
지난해부터 선생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삼매봉 동쪽 자락에 있는 기당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삼매봉을 내려와 방문했다. 그는 1987년 초대관장으로 취임해 국내 최초의 시립미술관인 서귀포시 기당미술관 정착에 힘을 보탰다.
1926년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태어난 변 화백은 6세 때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으로서 약관의 나이(23세)에 조선인 최초로 최고(광풍)상 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당대 일본 화단의 거장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20여년간 일본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둥지를 틀고 결혼하면서 교육자와 화가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업을 구축해나갔다. 그는 1975년부터는 제주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2013년 6월 8일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제주의 색, 새로운 기법을 찾기 위한 길고 긴 시도와 방황 끝에 어느 아침, 일어나는 순간 텅 빈 캔버스가 장판지 색깔로 휘덮이는 것을 발견했단다. 까칠까칠한 느낌의 황갈색이었다. 원초적이고 극도로 단순한 황갈색톤.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 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그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톳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체험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그림 속에 방금 전 삼매봉 아래 외돌개와 벼랑끝 절경들이 반복재생되듯 펼쳐진다. 고독과 외로움, 쓸쓸하고 처연한, 그리고 아찔한 풍경이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여백의 붓끝 초가집에 눌러 앉아 있거나 혹은 초가지붕 위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 사내, 혹은 한가로이 말 한마리와 쉬는 사내, 때론 위태롭게 폭풍 앞에 서 있는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기당미술관. 변시지 화백의 특별전은 지난달말로 끝났다. 현재는 제주현대미술관 문화예술공공수장고에서 영상전시로 만날 수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변시지 화백의 작품 ‘낚시1’. 제주 강동삼 기자
그리고 작품 ‘소식’에 담긴 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내를 보며 시인은 마주하고 있는 절벽은 바다로 차단된 길의 기호이며, 동시에 바다 너머 또 다른 길의 기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기당미술관 특별전 ‘변시지, 그림과 함께 기억되다’는 아쉽게 3월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 다만 제주현대미술관 문화예술공공수장고에서 ‘변시지: 황금빛 고독, 폭풍의 바다’를 4월21일까지 실감미디어 영상전시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