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일 70년] “독립 70년 지나도 유공자 후손은 행복하지 못해”

[격동의 한·일 70년] “독립 70년 지나도 유공자 후손은 행복하지 못해”

한재희 기자
입력 2015-02-13 00:12
수정 2015-02-1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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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부친 만주서 독립운동 헌신 양옥모 할머니

경기 양평군에서 지역 유지로 풍족하게 살아왔던 양옥모(74) 할머니의 가족이 어려워지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다. 당시 일제강점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 할머니의 조부인 고 양건석씨도 태극기 100여개를 만들어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후 건석씨는 주모자 색출을 벌이는 일본 순사를 피해 전답을 헐값에 처분한 뒤 중국 지린(吉林)성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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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옥모 할머니
양옥모 할머니


건석씨는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20년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건석씨는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은 후에도 배재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고 양승만씨까지 만주로 데려와 함께 조국 해방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건석씨는 평생 청산리 전투 총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병이 악화돼 1937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승만씨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승만씨는 만주를 떠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마찰이 발생해 36일간 구금되기도 했지만 승만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6년 11월 고국에 돌아와 만난 독립운동 동지가 ‘왜 혼자만 귀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 동포가 모두 귀국한 후에야 귀국하겠다는 결심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승만씨는 투철했다.

양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11년이다. 정부에서 지원한 정착금으로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한 주택 반지하에 세를 들어 살면서 70대의 몸으로 식당이나 병원을 돌며 일을 했다. 독립유공자 연금도 둘째 언니가 받고 있어 결국 양 할머니는 모아 둔 돈 조금과 매달 나오는 20만원의 기초노령연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제 양 할머니에게 남은 소원은 중국에 있는 자녀의 식구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다. 자녀의 초기 정착금을 구하기 위해 간간이 돈을 모으고 있다. 양 할머니는 “탈북자의 경우 직업을 구하기 전 자격증을 따거나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지원해 준다고 들었는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는 이러한 배려가 다소 부족한 것 같다”며 “자녀가 한국에 와서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담담히 힘들었던 지난날을 털어놓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던 눈시울이 자녀들 얘기에는 금세 붉어졌다. 독립 70년이 지난 지금도 독립유공자 후손인 양 할머니는 아직 행복하지 못하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2015-02-13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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