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폭력’-처벌 악순환 끊기… 치료 시스템부터 구축을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다중 살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식 범죄로 알려져 우리와는 무관한 듯 여겼던 이런 양상의 폭력이 두려운 것은 대상을 예측할 수 없어 예방이 어려울 뿐 아니라 살상 규모가 커 엄청난 충격과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이다. 흔히 ‘반사회적 범죄’로 규정하지만 우리 사회의 취약한 안전망으로는 대처할 수조차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범죄가 발생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으며 지금도 수많은 시민들이 이런 무차별적 범죄에 노출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원초적 야만성이기도 한 무차별 다중폭력을 의학계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 이에 대해 순천향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황재욱 교수의 견해를 듣는다.
최근 들어 잦아지고 있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은 사회적 문제의 분출이라는 점에서 다면적인 정신병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진은 폭력의 병리성을 설명하고 있는 황재욱 교수.
이런 범죄의 결과적 형태는 유사하다. 하지만 가해자에 대해서는 언론이 보도하듯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우며 외부와 고립·단절된 생활을 해 왔다는 점을 빼면 개인의 심리 상태나 정신병리의 유무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사회환경적 요인이나 개인의 정신병리적 원인에 의해 범죄자가 자신의 상황을 절박하고 절망적이라고 인식하면 억제하기 어려운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해 주변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 특히 여기에 충동성이 더해지면 폭력적인 다중살상으로 쉽게 이어지게 된다.
●이런 범죄를 유형화할 수 있는가.
폭력은 형태에 따라 ‘자해폭력’, ‘개인 간의 폭력’, ‘집단폭력’ 등으로 구분한다. 최근 발생한 무차별적인 살상을 포함한 폭력 행위의 경우 개인 간 폭력 중에서도 ‘지역사회 폭력’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사례의 경우 가해자가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는 진술이 있었고, 이런 범죄의 결과로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저질렀음을 감안하면 넓은 의미에서 자해폭력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실제 미국에서 발생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자살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련의 범죄가 발생하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두려움과 공포감이 형성되고 범죄자가 속한 특정 계층이나 집단을 경계하게 되는데 이런 경계 심리가 차별로 이어지면 다른 의미에서 집단폭력이 될 소지도 없지 않다고 본다.
●정신질환 중에도 이런 폭력성을 특성으로 하는 병증이 있지 않나.
증상이 폭력에서 나아가 살인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가장 흔한 사례가 음주 상태에서 충동 조절력을 상실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다. 이런 음주 폭력이 반복된다면 알코올 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 또 조현병(정신분열병)이나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우울 장애, 양극성 정동장애(조울병)의 경우 피해망상 등으로 불안·초조한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데 이 경우 가까이 있는 가족이 피해자가 되기 쉽다. 양극성 정동장애의 조증 상태 등에서도 감정이 불안정해 폭력성을 보일 수 있다. 또 반사회성 인격 장애의 경우 충동 조절이 안 돼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의도적으로 폭력이나 살인을 범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이 현대인에게 미치는 정신의학적인 영향도 클 텐데….
개인이 폭력이나 살상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될 경우 사람에 따라 자신이 외상성 사건(자신이 겪은 죽을 뻔한 경험)을 경험한 것과 유사한 강도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교통사고, 화재, 폭행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할 경우 여기에서 비롯된 충격이 심리적 외상으로 작용해 불안감을 보이거나 자극에 예민해지는 과각성, 외상성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재경험 등의 증상을 보이거나 심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현대인은 거대한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근대화 이전에는 한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구성원들이 경계심을 갖거나 불안, 긴장감을 느꼈다. 이런 정서는 자기 방어를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에 해당한다. 이런 본능이 도시에서는 적응되었다는 예단과 문명, 제도의 발달로 안전하다는 믿음에 의해 억제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지하철이나 한길에서도 별 불안을 느끼지 않고 수많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특정인이 직간접적으로 폭력을 경험하면 이런 믿음에 회의를 갖게 된다. 즉 ‘나도 다른 피해자들처럼 다중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시민들의 불안감과 긴장도는 커지는 게 당연하다. 이런 현상은 호신술에 관심을 갖거나 호신용품을 구입하거나 외출 시간을 줄이는 변화로도 나타나지만 타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간주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이 때문에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징후를 느끼면 방어적으로 과잉 폭력을 행사하는 2차적 폭력을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폭력성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자해폭력이나 개인 간 폭력은 폭력 자체의 제어도 중요하지만 폭력의 원인이 정신질환일 경우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성을 완화, 해소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폭력과 처벌’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피해자의 신체적 상해나 정신적 충격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제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에 구조적 한계가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적 폭력을 정신의학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렵지만 정신의학을 배제하고는 다룰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공론화해 사회적 합의를 이룰 필요가 있다. 실제로 폭력 문제가 훨씬 심각한 미국에서도 예방을 위한 다양한 연구가 있었지만 똑 떨어지는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사회적 병리 현상에서 비롯됐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가족 단위의 문제에서는 가장 약한 구성원이 희생양이 되는 사례가 많다. 이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는 물론 가족 모두로 치료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폭력적 상황과 같은 사회 병리 현상은 대부분 한 사회가 가진 문제가 취약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자 개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생활 환경, 정신병리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사회집단 전체나 계층 간의 갈등, 제도의 문제까지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2012-09-03 24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