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와 ‘소프트 파워’
국제정치학 ‘소프트 파워’ 이론강제 아닌 호감·설득을 통한 힘
美, 소련과 냉전 승리한 배경엔
하드 파워 외 강한 소프트 파워
정정한 95세 비전향 장기수 북송
‘K소프트 파워’ 가장 확실한 과시
李정부, 하드 파워 수단 배제 인상
평화통일엔 두 힘의 안배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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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 게임’, K팝 스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소프트 파워 강국이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소프트 파워의 본질은 대중문화를 넘어 올해 95세인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씨의 북송 문제처럼 우리가 지켜 나가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보여 주는 것에 있다. 사진은 ‘오징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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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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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화도 더욱 갈고닦아 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선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100년의 도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15일 이재명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축사 중 한 대목이다. K팝과 한국 드라마, 심지어 우리의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으로 인해 온 국민이 느끼는 자부심이 반영된 듯한 문장이다.
대한민국은 소프트 파워 강국이 됐다. 20년 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이야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상하게 들렸을 법한 소리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 낯설거나 엉뚱한 말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이어지는,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덩달아 한국 음식과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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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탄 소속사 하이브 사옥 앞에 모인 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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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프트 파워 강국으로
외국에 나가 ‘코리아’라고 하면 ‘노스’냐 ‘사우스’냐를 물었던 시대를 잠깐이나마 살았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변화는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하지만 자화자찬하며 안주할 수만은 없는 일. 우리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대체 소프트 파워란 무엇인가.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원래 있던 말’이 아니다. 누군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그 주인공은 조지프 S 나이. 하버드대에서 하버드 케네기 스쿨 학장을 지낸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다. 그 용어가 처음 공식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93년, 냉전이 끝나고 세계가 새로운 질서를 찾아나가던 무렵이었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절대 강국으로 자리잡은 미국이 어떻게 승리했는지, 앞으로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 그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되던 시점이었다.
여기서 잠시 국제정치학 전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국제정치학은 크게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라는 세 흐름으로 나뉜다. 현실주의는 ‘국제정치란 힘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는 비정한 무대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자유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는 준수해야 할 원칙이 있으며 그것은 자유주의적 가치와 일치하거나 상응한다’는 견해다. 구성주의는 ‘그 모든 것이 물질적, 개념적 요소를 통해 구성되며 고정된 것은 없다’는 제3의 견해다.
갑자기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조지프 나이는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다. 국제정치학의 학파 중 하나를 대변하는 그야말로 ‘교과서적 거장’인 셈이다. 둘째, 국제정치학 그 자체의 본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현실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나 구성주의라 하더라도, 국제정치가 힘에 의해 좌우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소프트 파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지프 나이의 책 ‘소프트 파워’를 펼쳐 보자. “파워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며, 또 소프트 파워는 약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 파워는 파워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나온다. 파워란 무엇인가.
“파워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이뤄 내는 능력이다. 이처럼 지극히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파워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파워의 또 다른 의미는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어떤 일이 이뤄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런 정의를 종합하면 파워란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능력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소프트 파워’ 개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소프트 파워도 파워다. 명령과 강제가 아닌 설득이나 호감 등을 통해 내가 원하는 바를 남이 하게끔 하는 것이 바로 소프트 파워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블랙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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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엔터테인먼트 제공
●공동 가치·정당성·책임감에 매력
“이처럼 명백한 위협이나 거래 행위 없이도 자국의 목표를 받아들이고 따르게끔 타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표현할 수 있어도 눈에 보이지는 않는 매력에 따라 타국의 행위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곧 소프트 파워가 제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소프트 파워는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무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색다른 통용수단을 활용한다. 즉 공동의 가치와 정당성, 그리고 그런 가치의 실현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매력 있는 대중문화는 소프트 파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세계인이 한국 문화를 즐기고 있는 현실은 매우 고무적이며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한민국이 소프트 파워 강국이 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나이가 잘 지적하고 있듯, 소프트 파워란 ‘공통의 가치’, ‘정당성’, ‘가치 실현에 대한 책임감’으로 작동하는 ‘파워’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듭 강조되는 ‘가치’에 주목해 보자. 어떤 가치일까. 조지프 나이가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의 거두라는 점을 놓고 보면 답은 분명하다. 소프트 파워 이론에서 말하는 ‘가치’란 다름 아닌 자유주의 국제질서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 대중문화 등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 전부다.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 이른바 선진국이라면 다들 인정하고 지키려 하는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프트 파워 이론의 전모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조지프 나이는 미국이 소련을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군사력에만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하드 파워’뿐 아니라 ‘소프트 파워’도 훌륭했기에 냉전을 승리로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소련의 관람객들이 정치와 무관한 소재를 다룬 서방영화를 본다 하더라도, 서방에서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설 필요가 없다는 점과 공동주택에 살지 않으며 저마다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소련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들에게 심어 준 서방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헛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는 어디에 있는가. 전 세계가 즐기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소프트 파워의 본질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소프트 파워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는 우리가 지켜 나가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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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 게임’, K팝 스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소프트 파워 강국이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소프트 파워의 본질은 대중문화를 넘어 올해 95세인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씨의 북송 문제처럼 우리가 지켜 나가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보여 주는 것에 있다. 사진은 지난 20일 오전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북한 송환을 요구하는 안학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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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가치서 비롯
올해로 95세인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씨의 북송 문제를 떠올려 보자. 1930년에 태어난 그는 1952년 8월 대남 무장 공작 부대로 알려진 북한군 제526군 소속 941부대에 배치돼 남파됐다. 1953년 4월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1995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42년을 복역한, 현재 생존 장기수 중 최장 기간 복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2025년 현재까지도 ‘미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공산주의 투사다.
지난 20일 안씨가 판문점으로 가기 위한 길목인 통일대교에서 인공기를 펼치고 걷는 모습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며 적잖은 논란이 벌어졌다. 아무리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여도 이렇게 대놓고 북한의 국기를 펼치고 다니는 것을 수수방관해서야 되겠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특히 보수 진영 일각에서 대두됐던 것이다.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러한 반발은 소프트 파워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안씨의 존재가 북한에 보도되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북송되는 것은, 북한을 향해 우리의 소프트 파워를 과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전쟁 당시 체포된 그는 고문을 받았으나, 이후로는 42년이나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출소 후에도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북한 깃발을 들고 걸어다녀도 무방하다. 이는 모두 대한민국의 체제가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그해 9월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된 후 북한 내부에 상당한 동요가 발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950년에 발발해 1953년에 끝난 전쟁의 포로가 2000년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 주민들에게는 차라리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를 접한 북한 주민들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몇십 년씩 옥살이를 하면서도 저렇게 영양 상태가 좋고 건강하다면 감옥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잘 산단 말인가.
소프트 파워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공산국가였던 체코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은 미국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수입됐을 때 발생한 문화적 충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미국의 여러 제도를 혹독하게 비판한 이 영화가 수입돼 개봉되자 체코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자국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분명 자긍심과 함께 내적으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또 그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바람직한 남북 관계를 지속하며 평화통일을 지향하려면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적절한 안배가 필수적이다. 그런 면에서 안씨의 북송은 환영할 일이다. 우리의 소프트 파워를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현 정부가 너무도 성급하게 북한을 향한 하드 파워의 수단을 배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데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으로부터 “조항 조항이 망상이고 개꿈”이라는 식의 조롱을 당하면서도 9·19 남북군사합의를 지키겠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재명 정부를 향해, 북한은 오히려 대남 확성기를 추가 설치하고 있지 않은가.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은 좀더 현실적으로, ‘파워’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전개돼야 한다. ‘오징어 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만으로 북한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2025-08-2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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