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미약 ‘스코폴라민’ 주성분이 추출되는 식물인 브루그만시아. 위키미디어 커먼스
멀미 치료약물인 ‘스코폴라민’이 피해자의 기억을 지우고 의지를 조종하는 무서운 특성으로 인해 범죄에 악용된다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악마의 숨결’이라는 섬뜩한 별명을 얻은 이 약물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흉악한 범죄의 새로운 무기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7일(현지시간) 더선 등 외신에 따르면, 스코폴라민이 현재 영국에서 범죄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원래 스코폴라민은 멀미와 메스꺼움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반 의약 성분이다. 기억, 학습, 조정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차단해 메스꺼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의료진 처방 없이 고용량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영국 킹스턴대 약학과 선임 강사 디파 캄다르는 “스코폴라민은 기억 형성과 회상 시스템을 방해해서 일시적이지만 심각한 기억 상실을 일으킬 수 있다”며 “이것이 범죄에 악용되는 핵심 이유”라고 경고했다.
이 약물에 ‘악마의 숨결’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자유의지를 빼앗아 타인의 요구에 저항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캄다르는 “피해자들은 꿈을 꾸는 듯한 느낌과 순종적인 상태를 경험하며, 가해자에게 저항하거나 사건을 기억할 수조차 없다”며 “이것이 바로 이 약물을 그토록 악명높게 만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성분은 신체 내에서 빠르게 작용한 뒤 약 12시간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인 약물 검사에서 검출되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에게는 10㎎ 미만 용량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영국에서 스코폴라민 성분이 포함된 멀미 치료제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픽사베이
스코폴라민 중독 증상으로는 빠른 심박수와 두근거림, 구강 건조와 얼굴 홍조, 시야 흐림, 혼란과 방향감각 상실, 환각과 졸음 등이 꼽힌다.
캄다르는 “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시거나 낯선 사람과 접촉한 후 이런 증상들을 경험한다면 즉시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라”고 당부했다.
지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3명이 이 약물을 사용해 사람들을 순종적인 ‘좀비’ 상태로 만들어 강도질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영국에서는 2019년 아일랜드 출신 댄서 에이드리언 머피가 그를 털려던 부부에 의해 스코폴라민으로 독살당한 사건이 이 약물과 관련된 첫 살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지난달에는 30세 여성 데보라 오스카가 런던 지하철에서 이 약물에 중독됐다고 주장했다. 애비 우드역에서 출발하는 엘리자베스 라인을 타고 있을 때 한 여성이 신문을 흔들어 자신의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자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는 설명이다.
다행히 온라인에서 봤던 ‘악마의 숨결’에 대한 영상을 기억해낸 데보라는 비틀거리며 지하철에서 내린 뒤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악마의 숨결’에 대한 신고는 주로 콜롬비아 등 남미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지에서 ‘부룬당가’라고 불리는 이 약물은 수많은 강도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휴가를 보내던 47세 캐나다 남성이 버스터미널에서 강도를 당한 후 약 12시간 동안 기억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현금 250달러와 휴대폰이 도난당한 것을 확인했다. 몸에 폭행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러워했으며 집중력 저하 증상을 겪었다.
그는 캐나다로 돌아간 후 의사를 찾았다. 약물 검사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다. 의료진들은 “환자가 스코폴라민 중독된 것으로 보였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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