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국제펜대회 참가 탈북 문인들이 말하는 ‘북한의 문학’
“사회주의적 자연주의를 강조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카프)과 구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 문학은 세계적 조류와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김정일이 1970년대 문화예술계를 장악하면서 문학 속 우상화 작업도 마무리됐지요.”14일 경북 경주에서 폐막한 제78차 국제펜(PEN)대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한 ‘망명 북한 펜 본부’의 정해성(67) 이사장은 탈북 이후 작품 활동을 “감개무량하다.”고 표현했다. 그는 1996년 탈북 전까지 조선중앙TV에서 방송작가로 일했다. 망명 북한 펜 본부에 소속된 28명의 탈북 작가 중 가장 먼저 한국에 왔고, 그런 인연으로 이사장을 맡았다.
정 이사장은 “북한 문학 속 등장인물은 한번 타락하면 벗어나지 못하는 이분법적 구조에 갇혀 있다.”며 “친일파가 회개해 해방 이후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 바쳤다는 설정은 상상도 못하고 아예 친일 반동분자의 등장을 금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성의 기준은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느냐이고,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해 인민의 충성을 끌어내는 정도에 달렸다는 것이다. 직접 쓴 대본에서 “김일성·김정일 교시를 집행하지 못하면 밥을 먹어도 모래알 씹는 것 같다.”는 대사를 인용해 이를 설명했다.


지난 14일 경북 경주에서 폐막한 제78차 국제펜(PEN)대회에 참가한 ‘망명 북한 펜 본부’ 소속 작가들. 사진 왼쪽부터 림일(44), 정해성(67), 김정근(44), 이진명(59)씨. 이들은 그동안 경찰의 경호를 받고 가명을 쓰기도 했다.
이어 북한에도 시·소설·희곡 등 분과가 있는데 남측 글쓰기와의 공통점은 권선징악이며 차이점은 표현의 자유라고 덧붙였다. 김일성 가계와 관련된 작품을 창작하는 4·15 문학창작단의 현승걸 단장을 예로 들어, 그가 사석에서 “언제쯤 쓰고 싶은 걸 쓸 수 있나.”라고 푸념했다가 요덕 수용소로 끌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적시했다. 엘리트 작가였던 정 이사장은 북한에서 즐겨 읽던 남한 작품으로 소설 장길산·토지·허준 등을 꼽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서 발간한 ‘시대’라는 잡지에 실린 시인 김지하의 시도 모두 섭렵했다고 했다.
1970년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희곡 특등상을 받은 이진명(59)씨는 “북한의 정형화 작업에 신물이 났다.”면서 “북한에서 문학 한다면 체제수호의 선봉장쯤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청진의 문학기자(통신원) 출신인 김정근(44)씨는 “또래인 임수경 의원이 1989년 6월 방북했을 때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됐다.”면서 “체제의 위대성을 선전할 각오가 없다면 북한에선 작가나 기자의 꿈을 접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안전부와 대외경제위원회에서 일했던 림일(44)씨는 “김정일은 사실 문학에 관심이 없고 무용·노래·영화 등 극예술에 치중했다.”면서 “해외유학파인 김정은도 일종의 ‘쇼’를 하고 있고 결국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말했다. 림씨는 평양출신으로 쿠웨이트의 조선광복건설회사에 파견돼 일하다 탈출해 1997년 한국에 왔다. 탈북 뒤 소설 김정일 1, 2권을 잇달아 내놓았다.
●‘절반의 성공’ 그친 경주 국제펜대회
한편, 북한출신 문인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던 경주 펜대회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한 체제의 폐쇄성은 널리 알렸지만 정작 국내 문학계에 대한 정부의 압력에는 침묵했다. 진보성향의 젊은 문인들을 끌어안는 데도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글 사진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2012-09-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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