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 범죄 무심코 말했다가… 단죄와 예술의 사이

꿈속 범죄 무심코 말했다가… 단죄와 예술의 사이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5-05-06 00:13
수정 2025-05-0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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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만화가 지피作 ‘스테이시’

꿈속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 주인공
예술의 자유·윤리에 대한 고민 던져
만화와 소설 사이의 ‘그래픽 노블’
문학의 형식·장르에 대한 질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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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은퇴를 선언했던 이탈리아 출신 세계적 만화가 지피의 복귀작 ‘스테이시’가 최근 한국어로 번역됐다. 이 그래픽 노블은 예술의 자유와 사회적 윤리를 둘러싼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오른쪽 만화 사진은 ‘스테이시’ 중 일부 장면. ⓒ마르코세리초메이·북레시피 제공
2021년 은퇴를 선언했던 이탈리아 출신 세계적 만화가 지피의 복귀작 ‘스테이시’가 최근 한국어로 번역됐다. 이 그래픽 노블은 예술의 자유와 사회적 윤리를 둘러싼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오른쪽 만화 사진은 ‘스테이시’ 중 일부 장면.
ⓒ마르코세리초메이·북레시피 제공


꿈속에서 벌인 일로 누군가를 단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꿈을 예술로 표현했다면 어떨까. 단지 꿈이었다는 핑계로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창작은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에는 나름의 법과 윤리가 있다. 무엇이 먼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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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어로 번역된 ‘스테이시’(북레시피)는 이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만화가 지피(본명 지안 알폰소 파치노티·62)의 새 작품이다. 2017년 한국에 왔던 지피는 2021년 돌연 은퇴를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이 인스타그램에서 논란이 되면서 대대적인 ‘캔슬 컬처’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스테이시’는 그가 은퇴한 지 2년 만인 2023년 내놓은 복귀작이다. 지난해 ‘나폴리 코미콘’에서 최고작품상인 미켈루치상을 받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다들 네가 그렇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80쪽)

주인공 지아니는 시나리오 작가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실수한 뒤 ‘나락’에 떨어진다. 최근 꾸었던 꿈이 무엇이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 버린 것이다. 꿈에서 한 여성을 겁탈했다고. 그 여성의 이름이 바로 작품의 제목인 ‘스테이시’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나 꿈의 내용이 발설되는 순간 그것은 다른 문제가 된다. 지아니를 추앙하던 소셜미디어(SNS) 이용자들은 순식간에 돌변해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지아니는 현실에서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하룻밤 꿈을 꾸었을 뿐이고 그걸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지아니를 향한 공격은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작가는 실제 경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지아니는 내면의 존재인 악마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나름의 해답을 향해 나아간다. 오로지 흑백의 선으로 표현된 작가의 황량한 그림체는 도발적이고도 철학적인 주제와 잘 어우러진다.

지피의 작품을 읽으면 주제와는 별개로 형식과 장르에 관한 질문도 함께 떠오른다. 만화는 문학인가, 아닌가. ‘스테이시’처럼 만화와 소설 사이에 있는 예술을 일컬어 ‘그래픽 노블’이라고 한다. 지피의 여러 작품은 그래픽 노블로 분류된다. 지피의 작품 중 ‘하나의 이야기’는 만화 최초로 이탈리아 주요 문학상으로 꼽히는 스트레가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탈리아 문단에서 이는 상당한 논쟁거리였다. 만화에 문학상을 줄 수 있는가. 만화와 문학은 각각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만화가 문학일 수 있다면, 만화는 문학보다 하위의 예술인가. 아니, 만화가 애초에 꼭 문학이어야 하는가.

이탈리아 언론 ‘도마니’는 “(‘스테이시’에서) 지피는 자신의 분노를 예술로 승화시켰고, 표현의 자유를 위한 공간이 여전히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했다. 서평의 맨 마지막 문장은 다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문명 속의 불편함은 쌓이고 있으며, 이제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2025-05-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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