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서… 나는 끝없이 망명합니다”[제33회 공초문학상]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서… 나는 끝없이 망명합니다”[제33회 공초문학상]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5-05-28 17:35
수정 2025-06-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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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문학상 수상자 장석남 시인

아버지 옷

다락방에서 아버지 옷을 입어보았다 아버지의
서른살 혹은 마흔몇살의 어깨를 감쌌던
소매가, 어깨 끝이 닳았고 안감은 너덜거렸다
중학생에게 터무니없이 컸으나 나는
그 옷 속에서 안온하였다 내 속에도 소중한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번쯤 그 옷을 걸치고 거리를 걸었던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감정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으나
골목 끝쯤에서 망설임에 패하여 돌아섰던가?
왼쪽 안주머니 앞에 수놓인 노란 아버지 한자(漢字) 이름이
심장에 닿아 따끔거렸는데 그것은 희미한 불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옛적, 집 안에 숨겨 보존했다는 전설의 그 불씨 말이야
아들이 곧잘 내 서른살의, 마흔살의 옷을 걸치고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쿵! 대문을 닫고 나간다
엉치 아래 내려오는, 소매 긴 옷을 입고
나는 알지 그 감정 자락을
아들이 눈 오는 저녁 거리로 나서는 날이면
나는 아득한 그 다락방으로 간다
함박눈이 쌓이는 그 다락방으로 가서
아버지 옷!
그래, 그 ‘아버지 옷’이라는 것이 있지
꽃이 꽃을 벗고
열매가 열매를 입듯이
아버지 옷
아버지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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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33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석남 시인을 28일 서울 성동구 청계천 인근에서 만났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은 허무의식 속에서 끝없이 자유를 탐구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도준석 전문기자
올해 제33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석남 시인을 28일 서울 성동구 청계천 인근에서 만났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은 허무의식 속에서 끝없이 자유를 탐구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도준석 전문기자


희망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희망은 있는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서 시인은 끝없이 ‘망명’(亡命)한다.

장석남(60)은 서정시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존재다. 평단의 주목을 받는 서정시가 궤멸한 시대에서 서정의 세계를 끝끝내 밀어붙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장석남의 세계를 단지 서정이라는 단어 하나로 집약하는 것은 가능한가. 따져 볼 문제다. 제33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인을 28일 서울 성동구 청계천 인근에서 만났다. 시상식은 새달 4일 열린다.

“아버지의 옷을 한번쯤 입어 보잖아요. 아버지가 입혀 주든 아니면 몰래 입어 보든. 저도 어렸을 적 아버지의 옷을 입어 봤죠. 그런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이 제 옷을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제 아이가 무슨 기분을 느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옷을 입었을 때 느낀 것과 같을까요. 저의 아버지에게서 제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옷 입어봤죠
그런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이
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걸 봐
제가 느꼈던 것 아들도 느꼈을까”

아버지가 있던 시간에서
아버지가 된 시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그리움의 정동’
수상작은 지난 1월 출간된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에 실린 시 ‘아버지 옷’이다. 아버지 옷은 시인에게 시간의 흐름을 떠오르게 한다. 내 옷을 입고 나가는 아이를 보면서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됐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시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있던 시간에서 아버지가 된 시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그리움의 정동이다. 이렇듯 시인에게 중요한 건 마음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인이 있던가. 장석남은 서정의 세계를 넘어선다. 지금 그를 휘감고 있는 건 바로 시대와 현실을 향한 강한 문제의식이다.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거짓말/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시 ‘내가 사랑한 거짓말’ 부분) 산다는 게 어떻게 거짓말이 되는가. 그리고 어째서 그 거짓말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희망 때문이다.

“산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죠. 희망이 없으면 살기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희망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스스로 만들면서 사는 거죠. 끝없이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요즘 현실을 보면서 절망을 느낍니다. 이 안에서 잘살고 있다?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거짓말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거죠.”

시단에서는 장석남을 서정시인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는 얼마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건 현실이었다. 새 떼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거기에 묻어 있는 피를 본다. 5월에 꽃을 피우는 모란에서 그는 강한 최루가스의 냄새를 맡는다. 아름다운 전원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시를 짓는 일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장석남의 시학은 또렷하고도 강렬한 정치학이다. 시 ‘서정시를 쓰십니까?’에서 시인은 제사(題詞)로 독일의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를 인용한다. 전체주의가 준동하는 가운데서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노래했다. 인용에는 많은 함의가 담긴다. 브레히트가 살았던 시대와 장석남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서늘한 진단이다.

“우리에게도 5월의 광주가 있었고 세월호가 있었죠. 그러나 명쾌한 해명도 없이, 외부의 적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국가 권력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섰어요. 도대체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 걸까요. 죄가 ‘창작되고’ 있는 현장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역사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데, 시는 너무나도 무기력한 것 같고….”

문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문자로 이뤄지는 예술
시인은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역사를 기록하는 자이기도 해

“내 나라인데 내 나라 같지 않아
망명지에 있는 기분
시는 유토피아로 이끄는 원동력”
‘법의 자서전’ 같은 시는 노골적이다. “나는 법이에요/음흉하죠/하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여러 개예요 미소도/가면이죠” 연작시 ‘마술극장’은 법정을 풍자한 것이기도 하다.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장석남이 이런 ‘정치적인’ 시를 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문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문자로 이뤄지는 예술이다. 따라서 그 시대를 정확히 ‘기록’할 수 있다. 내 안의 마음을 바깥으로 드러내고 거기서 보편을 획득하는 것 역시 시인의 일이겠으나 때때로 시인은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역사를 기록하는 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장석남은 그 역할을 자처하고 싶었단다.

극단의 허무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추구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뜻을 기리는 공초문학상의 정신이 오늘날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그는 “자유를 끝없이 탐구하고 찾으려고 했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부터 ‘내가 사랑한 거짓말’까지 ‘시인 장석남’을 관통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묻는 말에 그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망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 나라인데 내 나라 같지 않아요. 망명지에 있는 기분이죠. 망명지에는 계속 머무를 수 없잖아요. 잃어버린 유토피아로 되돌아가려는 의지. 그것이 제가 시를 지금까지 밀어붙인 원동력인 것 같아요.”

장석남 시인은

▲1965년 인천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수영문학상 ▲정지용문학상
2025-05-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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